영웅의 자리.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이스트우드는 그 자리에 있다. 이곳은 ‘그랑 토리노’를 촬영한 최근까지도 항상 이스트우드를 위해 마련돼 있다. ‘블러드워크’에서 연쇄살인범은 자신이 ‘같이 놀 수 있는’ 상대로 이스트우드를 지목한다(살인 현장을 보고 나오는 그를 향해 기자들이 묻는 말 “왜 하필 당신입니까?”). 이 세상에서 그는 언제나 영웅이기 때문이다. 장르, 혹은 신화의 공간에서 영웅은 항상 악당과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다. 이 영화에서 살인범은 죽기 전에 이야기한다. 너는 나를 필요로 해 이스트우드는 나는 너 같은 것이 필요 없다고 총을 쏘고 악당은 물속으로 가라앉지만 이스트우드도, 관객도 그가 가진 심장이 누구 덕분에 생긴 것인지 안다. 그가 존재하는 한 언제든 그들도 다시 물속에서 불려나올 것이다. 그리고 <그랑 토리노>에서 월트 코왈스키로 돌아온 이스트우드는 부서진 손을 보고 스스로에게 화를 내며 자책도 하지만 결국엔 늘 그렇듯 악당 앞에서 홀로 클라이맥스를 준비하는 것이다. ‘무법자 조쉬 웨일스’를 보면 최근작 ‘그랑 토리노’가 많이 떠올랐다. 영화 내내 침을 뱉은 코왈스키의 모습은 더티 해리보다는 조쉬 웨일스를 닮았다(게다가 그 둘은 항상 육포를 문다). 코왈스키가 몬족 가족과 유대감을 형성한다면 조쉬 웨일스는 떠돌이 인디언과 공동체를 형성한다. 정부, 국가보다는 개인 간 합의를 더 중요시하는 것은 이미 씨네21에 허문영이 소개한 대로 코만치족 추장과 조쉬 웨일스의 대화에서 나타난다. 그들은 이미 이곳에서(그란토리노의 젊은 신부가 말한)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고, 조쉬 웨일스는 당신의 삶을 내게 달라. 나도 내 인생을 너에게 주겠다며 공존할 것을 제안한다. 서로의 피로 문서 대신 악수를 청하고 수장은 그 제안에 응해 마을은 평화를 약속받은 듯하지만 문제는 조쉬 웨일스 자신이다. 영웅이자 악당과 현상금 사냥꾼의 표적, 혹은 영웅이면서 국가의 이름으로 제거되어야 할 개인. 조쉬 웨일스(ジョシュ··ウェールズは、)는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그곳에 너무 오래 머물고 있었다. 마을 사람들과 고만치족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그가 이곳을 떠나야 가능하다. 마지막 악당들과의 대결에서 조쉬 웨일스는 자신의 가족을 죽인, 자신이 복수해야 할 대상 앞에서 바로 총을 쏘지 않고 그 순간을 지연시킨다. 이 장면은 ‘그랑 토리노’를 먼저 본 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욱 뭉클한 장면이 된다. 가슴과 허리춤에서 총알 없는 빈 권총을 꺼내 테릴을 향해 발사할 때 더 이상 살인을 하지 못하고 연신 손가락 총으로 쏘는 시늉만 하는 월트 코왈스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. 더 이상 총을 쏘고 싶지 않은 영웅의 망설임이 시작되는 순간이다. 이스트우드는 진짜 총을 발사하는 순간 자신의 자리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. 조쉬 웨일스를 계속 추적해온 또 한 명, 플레처가 모든 전투가 끝나고 부상당한 그를 배웅하며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. 멕시코에서 그를 만나면 “이제 전쟁은 끝났다”고 전하고 싶다고 플레처가 말하자 조쉬 웨일스는 “그런가 봐”라고 답하고 돌아서서 떠난다. 이 짧은 대화는 개인과 개인 간의 한을 풀어주는 화해의 말이지만 그 화해는 일시적인 것이다. 남북전쟁은 이제 막 끝났지만 앞으로 이 땅에 더 많은 전쟁이 있을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. 조쉬 웨일스는 그 장소를 떠나지만, 앞으로 더 많은 도시를 만날 수밖에 없다. ‘그랑 토리노’에서 코왈스키로 분한 이스트우드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기까지 아직 수십 년이 남았다. 그 사이 그는 또 다른 영웅의 자리에 불려가 더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. + 위에 그리고 위에 글 쓴지 몇십년? 그 후 케이블에서 우연히 이 영화를 만났다. 추장과 조쉬 웨일스가 만나 대화하는 장면을 다시 봤다. 역시 좋은 장면. 삶과 죽음에 대한 대화. 이 대화 장면 하나만으로 나는 이 영화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. 영웅의 자리. 언제부턴가 이스트우드는 그 자리에 있다. 이곳은 ‘그랑 토리노’를 촬영한 최근까지도 항상 이스트우드를 위해 마련돼 있다. ‘블러드워크’에서 연쇄살인범은 자신이 ‘같이 놀 수 있는’ 상대로 이스트우드를 지목한다(살인 현장을 보고 나오는 그를 향해 기자들이 묻는 말 “왜 하필 당신입니까?”). 이 세상에서 그는 언제나 영웅이기 때문이다. 장르, 혹은 신화의 공간에서 영웅은 항상 악당과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다. 이 영화에서 살인범은 죽기 전에 이야기한다. 너는 나를 필요로 해 이스트우드는 나는 너 같은 것이 필요 없다고 총을 쏘고 악당은 물속으로 가라앉지만 이스트우드도, 관객도 그가 가진 심장이 누구 덕분에 생긴 것인지 안다. 그가 존재하는 한 언제든 그들도 다시 물속에서 불려나올 것이다. 그리고 <그랑 토리노>에서 월트 코왈스키로 돌아온 이스트우드는 부서진 손을 보고 스스로에게 화를 내며 자책도 하지만 결국엔 늘 그렇듯 악당 앞에서 홀로 클라이맥스를 준비하는 것이다. ‘무법자 조쉬 웨일스’를 보면 최근작 ‘그랑 토리노’가 많이 떠올랐다. 영화 내내 침을 뱉은 코왈스키의 모습은 더티 해리보다는 조쉬 웨일스를 닮았다(게다가 그 둘은 항상 육포를 문다). 코왈스키가 몬족 가족과 유대감을 형성한다면 조쉬 웨일스는 떠돌이 인디언과 공동체를 형성한다. 정부, 국가보다는 개인 간 합의를 더 중요시하는 것은 이미 씨네21에 허문영이 소개한 대로 코만치족 추장과 조쉬 웨일스의 대화에서 나타난다. 그들은 이미 이곳에서(그란토리노의 젊은 신부가 말한)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고, 조쉬 웨일스는 당신의 삶을 내게 달라. 나도 내 인생을 너에게 주겠다며 공존할 것을 제안한다. 서로의 피로 문서 대신 악수를 청하고 수장은 그 제안에 응해 마을은 평화를 약속받은 듯하지만 문제는 조쉬 웨일스 자신이다. 영웅이자 악당과 현상금 사냥꾼의 표적, 혹은 영웅이면서 국가의 이름으로 제거되어야 할 개인. 조쉬 웨일스(ジョシュ··ウェールズは、)는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그곳에 너무 오래 머물고 있었다. 마을 사람들과 고만치족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그가 이곳을 떠나야 가능하다. 마지막 악당들과의 대결에서 조쉬 웨일스는 자신의 가족을 죽인, 자신이 복수해야 할 대상 앞에서 바로 총을 쏘지 않고 그 순간을 지연시킨다. 이 장면은 ‘그랑 토리노’를 먼저 본 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욱 뭉클한 장면이 된다. 가슴과 허리춤에서 총알 없는 빈 권총을 꺼내 테릴을 향해 발사할 때 더 이상 살인을 하지 못하고 연신 손가락 총으로 쏘는 시늉만 하는 월트 코왈스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. 더 이상 총을 쏘고 싶지 않은 영웅의 망설임이 시작되는 순간이다